경기도역사4

경기도역사4 소개

안녕하세요.
경기도호빠입니다.

경기도역사4에서는 경기도의 한말, 일제강점기역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경기도역사4

한말・일제강점기의 경기도

경성 경기도청

경성 경기도청

19세기 제국주의 세력의 등장 이후 수도와 가장 가까웠던 경기만(灣)은 외세침략의 길목이 되었다.
프랑스와 미국의 침략으로 병인・신미양요가 일어났으며, 이어 일본도 무력시위를 벌인 끝에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인천이 개항되었으며 커다란 상품판매 시장인 경기도는 일제가 일찌감치 상권을 차지하는 곳이 되었다.
외세침략에 대한 저항은 의병투쟁으로 나타났다.
대표적인 의병부대는 단발령 공포 직후 최초로 결성된 이천수창의소(利川首倡義所)이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전후시기에 나타난 의병은 반일민족운동이면서 자주적인 근대국가를 수립하려는
반봉건 항쟁으로 발전하였다. 1907년 군대해산으로 발생한 정미의병 또한 경기도 지역에서 크게 활약했다.
1919년 발발한 3・1만세운동에서 경기도 지역은 전국 어느 곳보다도 가장 활발한 양상을 보였다.
개성의 학생들로부터 시작한 만세시위는 곧이어 고양과 시흥, 파주와 양평으로 이어졌고 점차 경기 전체로 번졌다.
당시 경기 지역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횟수의 만세운동과 가장 많은 인원을 기록하였다. 만세 운동은 3월 하순부터
경기도의 농촌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처음에는 태극기만 흔들며 만세 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서서히 무기를 들고 일본 경찰과 맞서기 시작했다.
경기도 최대의 무장 시위는 안성의 양성・원곡 만세 운동이었다.
2,000여 명이 모여 양성의 순사 주재소, 양성 우편소, 양성・원곡 면사무소를 공격했다.
이 시위는 황해도 수안군 수안면 만세 시위와 평안북도 의주군 옥상면 만세 시위와 더불어 3・1운동의 3대 투쟁으로
평가받고 있다.
1930년대 이후 식민지 산업화에 따른 공업지대의 발달과 함께 경기도의 인구가 크게 증가하였다.
경기도는 서울과 인천을 잇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공업지대가 조성되었다.
1930년 후반부터 전시통제가 강화됨에 따라 경성 및 경기도 지역에 공장, 사업소가 집중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1939년 통계에 따르면 경기도에 위치하고 있는 공장 수는 조선 전체의 22.4%(1,559개소)에 달했다.

경기학연구센터

출처 경기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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